예술/ 서울 도시계획

비상계단 Emergency Stairs @Guro

Posted: July 18th, 2010 | Author: | Filed under: architecture, project, Uncategorized | Tags: , , , , , , | No Comments »

Recently I moved into a factory called Seoul Art Space_Geumcheon (they call it 금천예술공장 in Korean, literally translated as Geumcheon Art Factory). It is an artist residency program located in Guro area – an aggregation of factories for heavy industries, which was part of the governmental urban planning during the 70′s. In the light of the IT industry, they started to call the Guro Industrial Complex to Guro Digital Complex and many visible shifts of the landscape began to ensue e.g. new skyscrapers, shopping malls, etc. Regardless of the struggles to refresh the atmosphere of the region by renaming it, reshaping it and even reprograming it in the name of Arts (like my residency space), the area doesn’t seem to easily get away from the impression of the Industrial region with poor factory workers.

There is an interesting anecdote I came across in the Postcapital lecture series at Total Museum, that this area had a very close relationship with rice price during the 70′s. Under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the government hold the price of rice in order to shift the country’s major investment from the agriculture to Fordist industry. This led many farmers in bankruptcy, thus they naturally moved to Seoul especially to Guro to find a job in the newly opened factories. The unchanging rice price gave them a downside of losing their farms in the countryside, but also gave them an upside of surviving with the low wage they were getting from the factories. Some says that the government captured two rabbits – a Korean expression that means to say, in this perticular context, that they succeeded in both industrial shift and procuring the labour force who could work with unreasonable remuneration.

So here they are, some backdrop stories for one of projects that I’m working on at the moment in relation to the place that I became a resident of. While wandering around the area for site research, i remarked an architectural form that frequently captured my eyes – 비상계단 Emergency Stairs in the factories.

I was interested in its raison d’etre as a liminal space in between what is practically used and what is originally designed for, existing as a state of emergency that has yet to occur. Not to mention the fact that it is a space designed for vertical movements, I am intrigued by its calm representation of the probability of such actions. As I speculate further upon its brutalist aesthetics e.g. blunt concrete forms, parasite metal structure, ad hoc patches, etc. that is prevailed around the Guro factory buildings, I started to draw a scenario that led this kind of spacial adaptation in relation to the economic needs of the era. It might be a mimicry of Japanese architecture of the time that had conspicuous external stairs – I could still observe so many cases in Japan, that even led me to conceive a project about it in Tokyo. As Japanese heavy industry made great influence when developing the one in Korea during the 70′s, perhaps they followed similar paths in constructing infrastructure i.e. architectural condition that inhabited the dynamic of such business. Although it had left rather a low-fi version of what they mirrored.

The external stairs started to hide inside the surface of buildings by the early 90′s. Thus the ones with external stairs also represent the state of building that is waiting for its death. Probably most of them are out in real estate auction.

This is work in progress, aiming at a rich taxonomy of architectural relics.


[예술경영웹진] 민선4기 메가프로젝트 시대를 되돌아보다

Posted: June 11th, 2010 | Author: | Filed under: Uncategorized | Tags: | No Comments »

민선4기 메가프로젝트 시대를 되돌아보다

[특집] 예술경영, 지역을 사고思考하다① 메가프로젝트

라도삼 _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연구위원

이제 마무리되고 있는 민선4기를 특징짓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메가프로젝트기期’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느 시도를 막론하고 대형 프로젝트가 펼쳐졌다. 서울에선 ‘한강르네상스’ ‘남산르네상스’ ‘디자인 서울’ 등과 같은 거대한 프로젝트가 펼쳐졌고, 경기도 또한 ‘경기국제보트쇼’ ‘유니버설스튜디오 유치’와 같은 빅 프로젝트가 이어졌다. 인천은 ‘세계도시축전’을 개최하였고, 2012년 아시안게임 대회 유치에 주력하였다. 이는 수도권뿐만 아니다. 전국 모든 지자체가 거의 해당되는 말이다.

민선4기가 이와 같은 대형프로젝트에 집착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핵심적인 이유는 민선3기의 성과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현재의 대통령인 민선3기의 이명박 서울시장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 몇 개의 프로젝트를 통해 서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개인적으로도 성공했다. ‘서울광장 조성’ ‘청계천 복원’ ‘서울숲 조성’ ‘대중교통체계 개편’ ‘뉴타운 개발’ 등 그가 일궈낸 굵직굵직한 성과들은 놀랄만한 것들이다. 때문에 민선4기는 이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민선3기가 그랬듯, 적어도 4년 안에 눈에 드러나는 특별한 성과를 창출해야 한다는 사실! 그로부터 민선4기는 대형프로젝트의 발굴과 개발, 시행으로 들어간다. 일본이 1990년대 불황을 극복하는 전략으로 대형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면, 우리는 정치적인 성공과 그에 힘입은 동기에 의해 대형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선3기 정치적 성공이 동력

실상 밀레니엄 시기에 도시적 혹은 국가적 단위에 기초해 추진되었던 독특한 대형프로젝트들이 많다. 영국은 런던의 템즈강 주변을 혁신하는 대형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추진하였고, 그 결과 테이트 모던과 같은 성과들을 낳았다. 프랑스도 파리를 개조하는 ‘그랑드 파리 프로젝트’를 통해서 미테랑 도서관과 같은 성과를 낳았으며, 중소도시였던 빌바오나 게이츠 헤드 또한 구겐하임 미술관의 유치와 세이지 음악당, 윙클 아이 브릿지, 발틱 미술관 건립 등을 통해 도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이 변화들은 ‘창조도시’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브랜드화 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21세기 초반에 기획된 많은 프로젝트들은 이처럼 밀레니엄 프로젝트에 영향을 받은 창조도시의 도시재생과 리모델링, 그리고 이의 문화적 활용에 관계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젝트는 아시아에 도입되며 더욱 더 큰, 대형 프로젝트로 자리 잡는다. 사막을 ‘미술관 도시’로 건립한 아부다비의 데저트 디자인 프로젝트(Desert Design Project)나 구룡반도에 15개의 문화시설을 집적하는 홍콩의 전략 등은 모두 그와 같은 대표적 사례다. 일본 도쿄도 롯본기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싱가포르 또한 에스플러네이드를 조성하는 등의 막대한 프로젝트를 추진한 바 있다.

이러한 대형 프로젝트는 분명, 도시 브랜드 가치 제고에 적지 않은 효과와 성과를 드러낸다. 최근 유명해진 도시치고 이런 대형 프로젝트가 없는 사례는 없다. 실례로, 스페인 동북부의 작은 탄광도시이자 바스크분리주의자의 테러도시로 악명을 떨친 빌바오는 ‘구겐하임 미술관’ 하나로 스페인의 핵심 문화창의도시가 되었고, 영국 뉴캐슬 옆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도시 ‘게이츠 헤드’는 최근 뉴캐슬보다 더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더구나 프랑스의 아비뇽이나 스페인의 산페르민, 영국의 에든버러 등 문화예술 상품을 개발한 도시가 유명해지는 것과 같이 문화예술이 갖고 있는 브랜드 창출 효과를 고려한다면, 최근 문화예술을 기반으로 한 대형 프로젝트를 펼치는 것은 매우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다.

다른 한편, 문화예술 분야의 이런 대형 프로젝트는 도시를 클러스터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전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사막에 다수의 미술 관련 시설을 건립한 아부다비의 전략은 루브르박물관의 유치와 예일대학의 유치 등에 힘입어 아부다비를 인접한 두바이 못지않은 창조의 중심지, 클러스터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중국을 변화시킨 ‘다산즈’ 또한 간단한(?)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다수의 자본이 베이징에 밀집하도록 만들었고, 도쿄 롯본기 지역에 새롭게 자리잡은 신국립미술관, 산토리미술관, 모리미술관 등은 아트트라이앵글을 형성하며 주변 지역에 수많은 갤러리를 입주시켰다.

더불어 이런 빅 프로젝트는 시민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미처 문화예술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시민들에게 예술에 대한 관심과 창의에 대한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도록 만든다. 예술에 대한 체험이 거의 없던 빌바오의 주민들은 구겐하임의 등장과 더불어 60% 이상의 주민이 예술을 체험하고 관람하는 시민으로 바뀌었으며, 게이츠 헤드의 발틱미술관은 예술교육의 새로운 거점으로서 뉴캐슬 지방의 시민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요컨대 빅 프로젝트를 통해 형성된 세계적 관심이 주민들의 자부심으로 이어져, 새로운 문화생활을 창출하는 현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메가프로젝트,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문화를 ‘소프트’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문화는 ‘환경적’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소프트야말로 문화의 일면이다. 문화는 오히려 환경 속에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이며, 때문에 환경을 어떻게 만들고 연출할 것인가에 (문화)정책의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대형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이끌며 새로운 문화클러스터를 만들어내는, 도시를 상징하는 빅 프로젝트야말로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는 동시에 문화에 대한 관심과 예술활동의 기반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를 형성한다 할 수 있다.

이러한 대형 프로젝트가 생활권의 문화를 위협한다는 비판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과정과 결과의 문제이다. 대형 문화시설이나 인프라의 확충이 문화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고, 일상생활 내에서 문화에 대한 관심과 정책을 유발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2002년 월드컵의 결과 일상 속에서 축제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낳았고, 그 결과가 ‘서울광장의 조성’과 ‘청계천 복원’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흐름은 빈공간의 문화공간화 및 광화문광장의 조성, 대형공원의 건립 등과 같은 환경과 문화를 기반으로 한 테마의 창출로 이어지고 있다.

메가이벤트의 근본적인 문제는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이벤트성으로 치러지는 대가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빅 프로젝트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빅 프로젝트로 인해 만들어질 영향력이 더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어느 곳에 대형의 문화시설이 형성되었다면, 사회적 자원은 그 흐름에 따라 흘러가게 마련이다. 예컨대 예술의전당 주변에는 현재 많은 악기상들과 연습실로 가득 차 있다. 다른 한편 세종문화회관도 한때 우리나라 공연예술의 산실로서 주변에 많은 네트워크-점적 시설들-를 형성하고 있었다.

대형시설이나 랜드마크의 등장은 이처럼 지형을 흔든다. 그렇기 때문에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전에 미리 이것이 만들어 낼 효과성-문화지형의 변화-에 대해 진단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때문에 막상 시설이 건립되었을 때 나 홀로 시설이거나, 대단히 성공하여 문화생태계 자체를 뒤흔드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창출하기도 한다. 100~300석 극장이 밀집되어 있는 대학로에 대규모 극장을 짓는 것은, 앞으로 이곳을 상업적으로 육성하겠다는 신호를 넣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막아야 한다.

준비성 없는 빅 프로젝트는 모두가 아는 매우 곤란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것은 콘텐츠의 빈곤, 즉 만들기는 멋지게 만들었는데 안에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나라 시설들에서 곧잘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다. 대형 시설, 멋진 공연장이나 전시장을 지었으면 거기에 넣을 콘텐츠부터 생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에 많은 소장품(공연콘텐츠)이 있다던가 아니면, 뛰어난 기획자나 운영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우엔 내가 아는 한 그런 곳이라곤 아무데도 없다. 모두가 지어놓고 난 다음에 굴러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서울시립미술관에 대해 ‘한국일보 분관’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나, 우리의 문화유산을 전시한다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그리스전’을 기획하는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 중에 하나다.

빅 프로젝트가 만든 최후의 절망적 사실은 빈곤한 콘텐츠에도 불구하고 만들었으니까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관’ 스스로 콘텐츠 만들기에 있다. 서울광장을 만들었으니 공연을 해야겠고, 광화문광장을 만들었으니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러한 문제로 만들어지는 공간의 정형성과 경성화 현상이다.

실로 하나의 공간이 탄생하면, 그 공간이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사람들은 공간을 기웃거리며, 기존형태로 우선 이용하다가 점차 그 공간에 맞는 프로그램과 운동양식, 그리고 문화적 형태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러기엔 시간이 없다. 우선 공간을 만들어 놓았으니 뭐든 해야겠고, 그러려면 그 공간을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조성자인 ‘관’이 스스로 짠다. 그 결과 그 공간에 익숙해질 시간은 없다. 모두가 공간의 ‘타자’가 되며, 주어진 프로그램을 소비하는 ‘관람자’로 전략하게 된다.

오늘날 빅 프로젝트가 갖는 슬픔은 바로 이와 관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논란에 휩싸이고 전시행정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것은 가장 비참한 결말이고, 하지 말아야 할 짓(!) 중 하나며, 프로젝트 자체에 대한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그런 빅 프로젝트가 너무도 많고, 대부분이 다 그렇다.

새로운 정치 환경, 과정의 중요성 부각되어야

불행하게도(?) 민선5기는 민선4기와 상당히 다른 분위기에서 출발한다. 지방정부 최초로 ‘여소야대’라는 새로운 정국이 나타난 것이다. 중앙정부와 광역단체장,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지자체 단체장과 의회 등의 관계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매우 다중적인 관계가 전개될 것이다. 아마 이 점은 분명 기존과는 달리 대형 프로젝트를 매우 어렵게 만들어 갈 것이다. 그간 별다른 비판과 검토의 과정 없이 일방적 ‘결재’에 의해 빅 프로젝트가 추진되어 왔다면, 이제는 의회나 중앙정부에 대한 설득과정이 존재할 것이고, 기초지자체와 광역자치단체 간 협력의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이제야말로 정치력이 없는 지방정부의 정치력에 대한 실험이 펼쳐질 것이며, 그 결과 많은 프로젝트들은 문제제기 단계에서부터 많은 비판과 토론, 검토로 그 정체(identity)가 뿌리째 흔들리는 수모를 겪게 될 것이다.

빅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어려운 이러한 여건은 긍정적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선 빅 프로젝트의 실종은 ‘문화’에 대한 관심 자체를 저조하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은 문화정책의 소외, 즉 예산의 축소와 같은 모습으로 현실화된다. 따라서 보다 더 전략적으로 ‘문화’에 대한 관심을 잇고, 시민들의 일상과 생활을 읽는 정책으로의 전환을 만들어가야 한다.

실제로 2007년 이후 최근 세계 문화정책의 흐름을 보면, 빅 프로젝트보다는 시민들의 일상을 돌보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또한 그 방식도 거대한 자연에 인공물을 세우거나 노후한 도심을 (재)개발하고, 리모델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경관을 살리며, 자연스런 쉼터이자 문화적 장(場)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일회적인 사업으로 연출되는 빅 프로젝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활용을 통해 공간을 연출해가는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예전과 다른 커뮤니티성의 존중이나 공공예술에서 참여예술로의 진화는 이와 같은 변화를 보여주는 예이다.

때문에 이젠 ‘빅 프로젝트 창출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빅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서 ‘인간’이 필요하다. 그는 매우 갈등하고 고뇌하며, 여러 사람들과 부딪히고 충돌하며 얘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얘기 과정을 공간에 입힘으로써 이야기(story)를 만들고, 그 스토리가 ‘스스로’ 얘기하도록(telling) 만들어내야 한다. 바로 공간을 만들어가는 전략적 교감, 예비적 프로젝트, 다양한 사람들과 행하는 소통, 전략적인 실험 등이 필요한 것이다.

공간을 만들려 하지 마라. ‘빅 프로젝트’가 아니라, 공간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변이를 즐기는 지혜가 필요하다.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닿고, 예술가의 때와 흔적을 묻히며, 건축가의 상상과 운영진의 지혜를 불어넣어야 한다. ‘신’은 우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신’의 뜻대로 절대로 살지 않는다. 그처럼 공간 또한 ‘신’-빅 프로젝터-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관계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그 달라짐을 어떻게 하면 크게 만들 것인가?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지난 몇 년간의 빅 프로젝트 시대에서 얻은 값비싼 수업료의 결과일 것이다.

라도삼은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신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1년부터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연구위원으로서 문화정책과 도시문화 등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다. 저서로 『인터넷과 커뮤니케이션』(한울출판사, 2000), 『블랙인터넷』(자우출판사, 2002) 등이 있다.


Namsan Art Center

Posted: March 10th, 2010 | Author: | Filed under: Uncategorized | No Comments »

Seoul Art Space_MULL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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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Art Space_YEON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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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Art Space_SIN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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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Art Spaces_GEUMC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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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Art Spaces_SEOGYO

Posted: March 10th, 2010 | Author: | Filed under: Uncategorized | Tags: | No Comments »


Posted: March 5th, 2010 | Author: | Filed under: Uncategorized | Tags: | 1 Comment »


The Cheonggyecheon used to be a naturally formed stream before the Joseon Dynasty designated Seoul as its capital. As the city had always been surrounded by mountains, its water was flowing into downtown. Because of the influence of the monsoon weather, it was dried in spring and fall, and warm and humid in summer.
Thus, the stream remained dry in fall and spring, but was likely to get flooded during rainy days in summer. There were many houses and shops along the stream flowing across downtown. On many occasions, heavy rain in summertime caused flood, with houses getting inundated and bridges getting damaged, and many casualties.

Thus, the Joseon Dynasty rulers attached a particular importance in the construction of a drainage system as part of the refurbishment project for the city. During the reign of King Taejong, the third king of the Joseon Dynasty, the work for overhauling the Cheonggyecheon was on his first priorities. The work, which had been carried out for two years from 1406, included dredging and bolstering the banks on both sides of the stream.

In 1411, a temporary authority named “Gaecheondogam” was set up to take care of the task of overhauling the stream. Early in the following year, work was carried out on a large scale for a month, involving a total of 52,800 men per day. The work included stone embankment for the mainstream and building up some stone bridges like Gwangtonggyo and Hyejeonggyo.

During the reign of King Taejong, overhauling the main stream had been the main focus. In contrast, a lot of efforts had been made to overhaul tributaries and streamlet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the fourth king of the dynasty, to prevent floods in downtown Seoul.
In 1441, an underwater column (called Supyo in Korean), marked with notches, was set up in the west side of Majeongyo (Bridge) to measure the water level in an effort against flood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the Cheonggyecheon was recognized as an important achievement for people’s everyday life. When Seoul was designated as the capital of the Joseon Dynasty, the theory of the configuration of the ground (“Pungsu” in Korean) came to birth: the Hangang (River) flowed from east to west along the outer boundary, while the Cheonggyecheon flowed from west to east into downtown.

At that time, there were no particular drainage systems. Thus, trash and wastewater flowed into the Cheonggyecheon in downtown Seoul. There were some officials insisting on the importance of the stream relying on the theory of the configuration of the ground and thus it should remain clean, while some others were supporting a more realistic opinion supporting the idea of the stream as a drain for people. King Sejong leaned to the latter’s opinion. Thus, the stream came to act as drainage for people living in Seoul.
King Yeongjo, the 21st king of the Joseon Dynasty, was the one who put the biggest efforts into the overhauling of the stream in the post-King Sejong period.

It appeared that King Yeongjo was willing to get remembered as a great king taking care of the need for overhauling the stream, like Yu the Great of the Xia Dynasty and King Yangdi of the Sui Dynasty of China, who used to get to be known for their greatest achievements in improving dramatically the management of the river along with their flood control projects.

For about half a century and until King Yeongjo came to the throne, after the changes made by Kings Taejong and Sejong, the stream saw no drastic change. Its capability remained sufficient to carry out household wastewaters from around 100,000 Seoulites.

However, the situation changed during the 17th and 18th Centuries. After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and the Manchu War in 1636, the population of Seoul greatly increased with people swarming from every part o the nation: from 80,000 people in 1657 to 190,000 in 1669. Under such circumstances, the amount of wastewaters increased to an extent that could not get covered by
the existing stream.

The situation got even worse since people who had newly moved to Seoul cultivated vegetables on every single space on both sides of the stream, causing some big drainage issues.

They were also using a lot of trees from the mountains as the main source of heat. Earth and sand coming from the bare mountains surrounding Seoul came to fill up the stream.

By 1725, when King Yeongjo came to the throne, the Cheonggyecheon was filled up by the ground and the sand swept from the mountains. The king established
“Juncheonsa (an office in charge of dredging streams)” in October 1759 after analyzing the situation on several

The newly established office started with its dredging work in February 1760, dividing the main stream and its tributaries into a total of eight zones and fixing the damaged bridges. The work included overhauling
water channels in all royal palaces.

The work continued for 57 days, mobilizing a total of 200,000 men per day. In June 1773, retaining walls were made on both sides of the Cheonggyecheon, and curved courses became straight ones, with the work carried out in three different sector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Cheonggyecheon went through some changes different from those made in the past. First of all, it came to get called “Cheonggye” as it is called today, supposedly from 1914, when the colonialists rearranged stream names in Korea.

In the past five centuries during the Joseon Dynasty, it was just called “Gaecheon (meaning a stream).” Looking at the newspapers published during that time, the name “Gaecheon” rarely appeared from about 1916, apparently giving its way to the “Cheonggyecheon.”

The stream used to be the border between Bukchon and Namchon of the capital during the Joseon Dynast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stream came to act as the border between Jongno regarded as the street for Koreans and Honmachi (referring to present Chungmuro), a Japanese town. The Japanese colonialists nicknamed the stream Dirty Stream by derision, instead of Cheonggyecheon (literally meaning a “Clean Stream”).

From around 1918, the colonialists started overhauling the stream in connection with their plan to establish the central institutions to rule the colony, including Joseon Government-General, north of the stream.

In the post-1920s period, the colonialists announced their plans to cover up the stream on several occasions, including one announced in 1926 to form a 10,000-pyeong (= 8 acre) housing site, one announced in 1935 to build up a road and an elevated railroad, one announced in 1939 regarding exclusively cars, and one announced in 1940 to build up a streetcar path along with a subway. Such plans were intended to solidify the colonial rule over Korea and develop Seoul as a supply base for the wars that the colonialists were waging against the U.S. and China, including the Pacific War.

However, with the exception of the Taepyeongno-Mugyodong section, which had been covered up in 1937, all those plans could never come true due to the lack of financial resources. The work for overhauling the stream caused many changes to the structures though. Due to the installation of a streetcar path nearby, Gwangtonggyo(Bridge) had been reinforced and expanded.

Next to the abutment of the bridge, sewage pipes exceeding 1 meter in diameter were buried. In 1908, Ogansumun, a landmark penstock, was completely dismantled to give its way to a bridge and a street. Several bridges, including Haranggyo and Yeongdogyo, were rebuilt.
By 1945, when the nation was liberated from the Japanese colonial rules, the Cheonggyecheon was filled up with trash,
ground and sand swept from the bare mountains and severely contaminated with wastes from shabby makeshift houses built alongside. After the Korean War (1950~1953), even more people swarmed into Seoul to find their way and make their living and settled down along the stream.

Those living in houses near the stream suffered a lot due to the stench caused by the large amount of wastes flowing into the stream. Thus, the image of Seoul had also been severely affected.

It appeared that the handiest way to put an end to the multitude of shabby, makeshift houses and the dirty smell was to cover up the
stream with concrete. Finally, the work to cover it up with concrete
started as quickly as possible by August 1958, with the 136m section
near Gwangtonggyo completed in 1955 ahead of the remaining

In addition, a 5.6 km-long, 16 m-wide elevated highway extending
from Gwanggyo to Majang-dong was completed over the stream in
August 1971 after four working years. Thus, all makeshift houses
along the stream were demolished, freeing the place for some modern
commercial buildings.

A multitude of large and small tool, lighting, shoes, clothes, secondhand book stores were opened one after another along the concrete-covered stream, attracting some endless lines of customers. Every day there were hundreds of thousands of vehicles passing through the covered stream and the elevated highway. The area eventually became the busiest and noisiest sector in Seoul. No other area in Seoul can reflect the city’s history of the past half-century better than the Cheonggycheon area, though.

By the end of the 1950s, it became a symbol of poverty and slovenliness, being filled up with trash and wastes. During the 1960s and 1970s, it was regarded as an example of successful industrialization and modernization. Then, in the 1980s and 1990s, it came to be regarded as a source of intense traffic, health and environmental issues.

Text by http://www.sisul.or.kr/grobal/cheonggye/eng/WebContent/index.html